나의 아이를 우리나라 최고라 여겨지는 고등학교에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한국 교육의 현주소를 알고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희망을 버렸다. 초중고 공립 학교에서 근무해본 나는 그래도 학생을 선발해서 지도하는 학교에서는 조금 다를거라 기대했다. 그래서 아이가 할 수 있고 원한다고 믿었던 그 순간부터 아이가 원하는 학교에 가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정서적,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 입학 후에 나는 아이와 마찬가지로 줄세우기식 평가와 겉으로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폐쇄적인 학교 분위기에 실망했고, 그 안에서도 교육 이상과의 괴리에서 고뇌하는 교사들과 현실에 안주하며 예전 교육을 반복하는 교사들 사이의 갈등도 보았다. 그래도 학비가 있는 학교인데 다름이 분명히 있겠다 생각하면서 대부분 부모들이 바라듯 아이가 학교에서 행복하게 자신의 꿈을 찾아가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동안 원하는 학교에 가고 싶어서 밤낮 가리지 않고 노력했던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는 교육이 아닌 수학을 얼만큼 선행했고, 암기력이 얼마나 뛰어나며, 선생님의 문제 의도를 얼마나 빠르게 파악하고, 정답 키워드를 찾아내야하는 교육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9 to 9으로 공부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하루종일 당연하듯 해왔던 아이들은 이미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고등과정을 끝내고 입학했다. 그 아이들은 학교에서 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그나마 여유있게 즐겼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학업을 따라가면서 활동까지 하느라 턱없는 시간 부족에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과목별 수행평가, 중간고사, 기말고사, 수능 모의고사, 각종 행사를 거쳐 1학년이 끝나면 내신 성적은 결정되고 더 이상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적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은 학생들은 자포자기 하기도 하고 성적이 잘나온 아이들은 원래 의대 진학이 목표가 아니었어도 의대로 진로를 돌리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문제는 내신 공부를 하는 동안 교사가 원하는 답을 찾고 암기해서 정해진 시간 안에 적어내야 하기에 자신의 생각을 넓혀가지 못하는 평가 방식과 학교 안에서의 등급 경쟁으로 성적과 등수에 연연하다보니 원치 않아도 어느 순간 나의 친구가 내가 올라서야 하는 경쟁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협업하는 능력은 무시된 채 다른 친구보다 점수를 잘 받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내가 이 학교에서의 배움을 통해 나의 진로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하는지 그래서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내가 하는 활동들이 어떤 가치가 있고 우리 학교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진정 나만이 가진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친구를 바라보는 기준은 어느새 수학 성적이 되고, 어떤 레벨의 동아리에 가입되어 있느냐에 따라 서울대를 갈 수 있을지 없을지를 그룹화하며, 학교의 가치는 소위 말하는 최상위권 대학의 입결로 정해진다.
영재고, 과학고, 자사고, 예술고 등은 뭔가 특별한 인재를 양성하는 곳일 것 같지만, 알면 알수록 기술을 습득하는 측면 외에는 기득권 세력의 말을 잘 듣고 그 이상은 넘어설 수 없는 인재로 사육하는 교육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에 선한 영향을 주는 인재로 키우려면 개인의 재능과 다양성을 서로 존중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상대의 의견도 받아들이며 보다 창의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하는데 그런 교육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학교들의 입학을 준비하는 동안 사교육비가 적게는 월 몇 백 단위에서 많게는 천만원 단위까지 들어가고 그 안에서라면 각 가정의 경제적 수준대로 조금은 수월하게 입학을 준비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는 내신을 잘 받기 위해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고, 학원과 과외 선생님이 만든 커리큘럼 내에서 또 잘하기 위해 자신들의 소중한 시간을 채운다. 그동안 스스로 생각하는 주도적인 힘은 길러지지 않고 선생님이 시키는 것 위주의 학습으로 인해 수동적인 사고로 로직이 변한다. 물론 선행을 하지 않았거나 혼자 선행을 한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더 힘들어지고 더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부족한 시간 속에서 학원 선생님의 다년간의 내신 출제 분석을 통한 쪽집게 문제는 입학 후에도 이어지는 사교육의 진리를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주면 그 안에서 열심히 하고 잘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고 하며 부모의 양육 태도로 책임을 돌리기도 하지만, 고등학생이 된 자녀 스스로도 그동안 초등 저학년부터 특정 지역 학원 등에서 공부를 일찍 시작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를 하며 환경으로 인한 한계에 부딪힌다. 그리고는 대학 입시를 치르며 말한다. 내가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동에서 어릴적부터 선행을 시킬거라고.
이런 현상은 분명 잘못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당연한 듯 생각하거나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사람들은 점점 더 교육 특구로 몰린다. 그리고 그 외의 지역은 교육 격차가 더 심해진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더 이상 차이를 줄일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며 외면하는 척 살아간다. 그리고는 결혼과 출산을 할 젊은이들은 말한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에 따라 부와 가난은 되물림 되고 그래도 교육만이 새로운 기회와 부를 얻을 유일한 방법이라 여기며, 내 자식이 남보다 더 앞서길 바라는 마음에 과한 사교육은 계속된다.
사교육으로 아이들이 학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부모는 오히려 교육은 부모가 하면 자녀와 사이만 나빠진다고 말하며 경제적 여유를 기회 비용으로 즐긴다. 그리고 사교육을 많이 받은 아이는 투자 대비 성과를 내어주며 이것이 바른 방향인 듯 여론은 흘러간다. 정작 중요한 교육은 스스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경험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안에서 배우며 시행착오 할 기회를 갖는 것인데 이런 경험과 기회들을 사교육을 통해 애써 줄이고 있다.
주어진 것들 안에서만 잘하는 아이들은 어떤 생각과 비전으로 삶을 스스로 가꾸어나갈 수 있을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류의 발전을 위해 쓸 생각은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고 찾을 수 있는 시간이 없이 가이드 해준 것을 맹목적으로 따라간 아이들은 개인의 경제적 부와 명예를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다. 나는 그것이 분명 장기적으로 우리나라의 발전을 저해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될거라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나. 역사적으로 되짚어 올라가 지도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원인을 찾아보기도 하지만, 그럴 것이라는 가정만 할 수 있을 뿐 긍정적인 변화를 예견하기가 어렵다. 그동안 변화를 꿈꾸며 교육에 헌신하고 노력한 분들도 있으나 그들의 다년간의 노력조차도 학연 지연으로 더욱 단단해진 한 개인의 사욕에 의해 묻히고 오히려 이기적인 이들에게 유리한 사회가 되어가며 교육계도 무뎌지고 변화에 더욱 소극적이 된다.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생각으로 다소 무겁고 부정적이지만, 이런 단면이 있는 현재 우리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변화는 개인의 생각들을 말하고 함께 공유하면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다음에는 우리나라 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에 관한 희망적인 이야기를 써야겠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몇몇 선택지가 있다. 어떤 길이 우리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길일까. 하루하루가 처음인 부모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지난해 내 아이에게 유학이라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졌고, 아이는 그 길을 선택했다.